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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봉 역사이야기16) 남이(南怡) 장군

2012-01-27 0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백두산석마도진/  두만강수음마무/   남아이십미평국/   후세수칭대장부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이 마시어 다 없앤다.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일컬을 것인가?




  이 시조는 남이장군의 기개가 넘치는 글이었지만 간신 유자광이 세번째 연의 未平國을 未得國으로 고처서 8대 예종에게 보고하였다.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보고함으로 역모죄를 뒤집어 씌운 것이다. 소위 쿠우테타를 꿈꾼 시조가 되어 죽음으로 이끌어 젔다.




  남이(1441~1468)는 7대 세조 때의 장군이다. 본관은 의령. 태종과 원경왕후의 넷째 딸인 貞善公主의 손자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태종의 사위인 宜山君이고, 아버지는 군수 남빈(南汾)이며, 어머니는 현감 홍여공의 딸이고, 부인은 좌의정 권람(權擥)의 딸이다.  1457년(세조 3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7년 (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 났을 때 이를 평정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올랐다. 이어서 서북변의 건주위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진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다.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였다.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않된 1468년 (세조 14년, 예종 원년) 하늘에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이 들어 설 징조”라고 했다.






  이것을 엿들은 유자광은 그가 영의정 康純등과 모여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여 지독한 고문을 받게 함으로 죽음으로 이끌었다. 유자광의 거짓 고변을 들은 어린 나이의 예종은 거열형(車裂刑)이라는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을 내려 죽게 하였다.






  그 때에 남이의 나이 28세였다. 그러니까 위의 未平國이란 시와 혜성의 이야기로 하여금 임금을 분노케 하여  남이장군을 죽인 것이다. 유자광은 남이와 같이 이시애란을 평정한 공신이었으나 남이가 세조의 총애를 받아 급출세를 하는 데에 시기와 질투를 갖고 있었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들어서자 한명회, 신숙주등을 통하여 병조판서에서 해직케 하였고 드디어 남이를 역모죄로 제거하는 모사를 꾸민 것이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이지만 모사꾼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남이의 시호는 忠武,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에 있다.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창녕의 구봉서원,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서울 성동의 충민사에 배향 되였다. 헌데 남이장군에게는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설이 따르고 있다.




  (출생의 전설) 남이는 짐승의 원혼이 환생한 것이라고 한다. 인신공희(人身供犧)를 받는 거대한 지네나 뱀이 그 폐해를 없애려 한 어느 이인에 의하여 퇴치된 뒤 원수를 갚으려고 사람으로 태여난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 부터 비범한 능력을 가지게 되였고, 몇 차례 스승 또는 아버지인 이인을 해치려는 시도 끝에 원한이 해소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태여난 것이 남이라는 것이다.




 (결혼의 전설) 남이가 어렸을 때에 거리에서 놀다가 종이 보자기에 작은 상자를 싸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위에 분을 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 뒤를 따라 갔더니 권람의 집으로 들어 갔다.  잠시 뒤에 집에서 우는 소리가 나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주인집 낭자가 갑자기 죽었다”고 하므로, 남이가 “내가 들어가서 보면 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허락치 않다가 한참 뒤에서 허락하였다.  남이가 들어가니 낭자의 가슴을 타고 앉아 있던 귀신이 곧 달아나고 낭자가 일어나 앉았다. 남이가 밖으로 나오니 낭자는 다시 죽었는데 남이가 또 들어가니 낭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자 남이는 자기가 본 바를 이야기 하고 약으로 치료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남이는 권람의 사위가 된 것이다.




  (남이 섬의 전설) 강원도 춘성군 북한강 자락에 ‘남이 섬’이 있다. 그 곳에 가 보면 남이가 죽어서 그 곳에 묻혔다는 돌무덤이 있다.  거기에서 돌을 함부로 가저 가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데 실로 남이의 무덤은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에 부인과 쌍분으로 모셔저 있다. 




 이러한 각종의 전설 이외에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죽령산에서 남이가 무예를 닦았다는 남이바위의 전설. 시골의 무당들이 남이장군의 영혼을 모신다고 하면서 젊은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는 “백두산석은 마도진이요 두만강수는 음마무라 남아이십에 미평국이면 후세수칭은 대장부랴”하고 소리를 높이는 무당굿소리…. 남이장군은 죽어서도 그 영혼이 온 나라의 방방곡곡을 혜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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