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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봉 역사이야기9)송강(松江) 정철

2011-12-09 0
   정철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문인, 정치인, 학자, 작가이다. 관동별곡 등의 가사와 한시를 지었으며, 당대의 시조문학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한국의 시가사상 쌍벽을 이룬다. 당색으로는 서인의 지도자였고, 이이, 성혼 등과 서로 교유하였다. 본관은 연일, 자는 계함이고, 호는 송강, 시호는 문청이다.




   동령부 판관인 정유침의 막내아들이며, 인종(12대)의 후궁 귀인 정씨의 남동생이었다. 둘째 누이가 계림군 유의 부인이 되였기에 어려서 부터 궁중에 출입하였고, 어린 경원대군
(후일 명종)과 친숙해졌다.




   정여립의 난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기축옥사 당시에 형관으로 있으면서 동인인사 2000여명을 처형하여 동인의 반발을 샀다. 기대승, 김인후, 양응정 등에서 글을 배웠다.




  10세(1545)때 명종 원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의 연루로 인하여, 정철의 맏형은 장형을 받은후 유배중에 죽었고, 그의 아버지를 따라 관북 정평 연일 등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16세(1551) 때에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조부의 산소가 있던 전라도 담양의 창평 당지산으로 이주하여 10년을 보냈다. 그 곳에서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 당대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읽혔으며 이이, 성혼, 송익필과 같은 또래의 유생들과 친교를 맺었다. 17세(1552) 때에 성산지방의 부호였던 유강항의 딸과 결혼하여 이후 4남 2녀를 낳았다.




  26세(1561) 때에 진사에 일등합격을 하였고 이듬해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이 때에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명종이 그를 왕궁으로 불러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었다. 그의 첫 벼슬은 사헌부 지평이었는데 그 때에 이가 처음으로 다룬 일은 국왕의 사촌동생이 저지른 살인사건이었다. 명종은 정철을 따로 불러서 그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부탁하였지만 정철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를 사형에 처하였다. 화가 난 명종은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32세 때에는,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는 제도인 사가독서를 받아 이율곡은 물론 많은 뭇 유생들과 함께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후 수찬, 좌랑. 종사관, 교리, 전라도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40세(1575)에는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였다. 벼슬을 내놓은 이유는 그의 강직한 성격 때문이었다. 굽힐 줄을 모르는 그의 성격은 가는 곳마다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은 곧 당쟁의 불씨가 되였다. 서인이었던 그는 동인의 영수 김효원을 맹렬히 비판하여, 친하게 지내던 이이 율곡으로 부터 조정을 혼란시키는 전쟁을 일삼지 말라는 충고를 받음에 실망을 하여 낙향을 결심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골에서 군성증이 나 있던 마당인데




  43세(1578) 때에 다시 부름을 받고 사간, 집의, 직제학을 거처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낙향하였다. 45세(1580) 때에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되자 흔쾌히 수락했고 이 때에 ‘관동별곡’과 ‘훈민가’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적 기질을 발휘하였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도승지, 예조참판, 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49세(1583) 때에 예조판서로 승진하였고, 이듬해에 대사헌이 되였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고 이후 4년동안 향촌으로 내려가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 은거기간동안에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한문과 한글로 된 가사와 수많은 시조와 한시를 창작하여 한국문화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54세(1588) 때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을 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동인을 치죄하고 이듬해에 좌의정이 되였다. 허나 서인의 집권은 오래 가지를 못하였다. 56세(1591) 때에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서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 하자,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 당하고 유배되었다. 이때에 선조는 정철을 향해 “대신으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고 호통을 쳤다 한다.




  한 때 이이도 정철에게 “함부로 말을 내뱉지 말고, 제발 술을 끊으라”고 충고하였다. 57세(1592) 때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여 의주까지 호송하였다. 이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제찰사를 지냈고, 다음 해에는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다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에 우거하다가 58세(1593)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관동별곡 사미인곡등 국문학적 가치는 높이 평가 된다.




  정철은 성격이 불같고 술을 즐겼으며 직설적이었기에 중앙관직을 지키고 있을 때에는 정치적 논쟁을 많이 일으켰지만 지방직이나 유배를 당하였을 때에는 오히려 문학을 즐기고 있었기에 그의 문학을 비꼬아 귀양문학 또는 좌천문학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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