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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오피니언] (중앙 글사랑 마을)달을 보고 울었더래요
기사입력 2017-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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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
 
오클랜드의 달
 
시드니에 사는 형한테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위독하니까 언제든 올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했다. 어쩌면 며칠 안으로 큰일을 치를 지도 모른다는 슬픈 얘기도 흘렸다. 나는 당장 비행기 표를 끊겠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효도에는 내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활절을 앞두고 있어 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몇 시간을 뒤져 시드니행 이티켓(E-Ticket)을 여권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이런저런 준비를 한 뒤 바람도 쐴 겸 바깥으로 나갔다.
 옅은 구름 사이 저 멀리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 슬픔을 묵상하기에 딱 좋았다. 나는 괜스레 눈물이 났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내 가슴에 밀어닥쳤다. 하릴없이 집 주위를 돌았다. 서너 걸음 내디디고, 보름달 한 번 보고. 그렇게 수십 차례 의식을 치렀지만 야속한 달님은 나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여든 중반이 넘는 삶을 사시는 동안 큰 병을 앓은 적이 없었다. 연세에 견줘 건강하게 사시고 계셨다. 그런데 암이라니. 어머니는 지난 1월 초 둘째 누이와 여동생을 따라 시드니에 가신 뒤 한 달 만에 암 판정을 받았다. 신장암 말기였다. 의사 말로는 길어야 여섯 달이었다.
 어머니는 천상 소녀였다. 말도 행동도 생각도 열다섯 소녀 같았다. 주위 사람으로부터 ‘귀엽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어머니는 그 말에 애써 토를 달지 않았다. 그냥 부끄러운 듯 “OO야. 사람들이 나만 보면 귀엽다고 그래. 교회에서도 노인학교에서도. 여든 넘은 쭈그렁탱이 할머니에게 말이야. 근데 니가 봐도 내가 귀엽니?”그러시며 귀여움의 부록 편을 이어 나가셨다.
 따져보면 어머니가 그렇게 된 것은 내 잘못이 크다. 옆구리가 결리느니, 소변이 잘 안 나오느니, 뭘 먹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다느니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지 말았어야 했다. 신장암의 삼대 증후를 나는 그저 나이 많은 할머니의 일상적인 푸념으로만 여겼다. 효자는커녕 어머니의 남은 생명을 갉아 먹은 불효자였다.
 내가 사는 동네를 몇 바퀴 돌아도 슬픔이 사라지지 않았다. 갑자기 1970년대 초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초등학교 삼사 학년 무렵이었을 때다. 어머니가 아버지랑 부부싸움을 한 뒤 집을 나갔다. 어머니의 둘째 오빠가 살던 중부시장 허름한 식당이 피난처였다.
어머니는 고만고만한 다섯 자식이 안중에도 없는 듯 며칠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밤마다 옥상에 올라가 달을 보며 울었다.
“엄마, 엄마. 착한 우리 엄마.”
그런 구성진 노래 가사를 수십 차례 읊조렸다. 내 노래가 엄마 마음에까지 닿았는지 얼마 뒤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단팥빵을 한 아름 싸 들고 집에 돌아왔다.
“OO야. 엄마 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달님이 내 노래 아니 내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어머니는 훗날 이 얘기를 심심할 때마다 꺼내 나이 오십 넘은 아들을 놀렸다. “너 그때 엄마 보고 싶어 많이 울었다며? 옆집 사는 정애 엄마가 종종 얘기했거든. 그런데 정말로 엄마 보고 싶었니?”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을 보니 보름달이 구름 속에 갇혀 있었다. 어머니가 계시는 시드니로 떠날 시각이 몇 시간 남지 않았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보고 싶은 마음도 더 거세졌다.
“엄마! 조금만 참으세요. 둘째 아들이 사랑하는 엄마 보러 갈 테니까요. 아셨죠?”
 
시드니의 달
 
내가 시드니에 도착한 날, 어머니는 여동생 집에서 의사의 진료를 받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어머니는 계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OO 왔구나. 바쁠 텐데.”
그러면서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 순간만큼은 암의 고통도 없어 보였다. 둘째 아들이 두 시간짜리 모르핀이었다.
어머니는 그날 오후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다. 그 뒤 백약이 무효였다. 그저 고통 없이 환자를 죽게 하는 게 담당 의사의 임무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서서히 죽음 곁으로 가셨다. 열 마디 말에서 다섯 마디로, 결국은 침묵으로. 열 숟갈 식사에서 묽은 음료수로, 끝내는 ‘NIL by Mouth’(입에 아무 것도 먹이지 말 것)로.
어머니의 마지막 투병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암 말기 환자치고는 험한 모습도 없었다. 대신 날개 없는 천사의 모습을 하고 계셨다. 이미 흘러간 지난 삶은 벅찼지만, 앞으로 다가올 삶은 행복해 보였다. 돌아보면 그것은 어머니가 다섯 자식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아주 이별이지는 않은, 산뜻한 헤어짐.
시드니의 가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쭉쭉 뻗은 유칼립투스 나무 사이로 가을의 원숙함이 하늘 끝까지 치고 올라갔다. 날씨마저 궂었다면 내 마음이 더 쓰렸을 것이다.
어머니를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그 뒤 나는 며칠을 앓았다. 슬픔에도 무게가 있다면, 내가 진 무게는 과연 얼마나 됐을까. 하루 이틀 지나면서 나는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다. 시드니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근사한 식당에서 우아한 식사도 했고, 차를 타고 한 시간을 넘게 가 늦가을 단풍을 즐기며 글감을 찾기도 했다. 여동생이 사 준 밤색 구두가 너무 맘에 들어 허공에다 힘찬 발길질도 해댔다. 어머니를 잊는 방법은 그렇게 ‘비아들적’이었다.
시드니를 떠날 날이 다가왔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 땅에서, 어머니가 살아 계셨던 땅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지 어미를 잃은 형제들은 어머니의 부재를 이런 식으로 달랬다.
“서로 이렇게 생각하면 좋겠어요. 시드니에 사는 우리(세 형제)는 어머니가 오클랜드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오클랜드에 사는 형제들(나와 큰누나)은 어머니가 시드니에 계신다고 그렇게요. 일 년에 한두 번씩 왔다 갔다 하셨으니까요. 앞으로는 햇수가 좀 멀겠지만 천국에 계시는 어머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자고요.”
 돌아갈 짐을 챙겼다. 짐이라야 검정 양복 한 벌과 책 두 권, 그리고 어머니 회고집이 다였다. 회고집은 명색이 글쟁이라고 하는 내가 어머니 장례식 때 조객들에게 나눠준 작은 책자였다. 어머니 관련 글 일곱 편으로 꾸며진 회고집의 앞 제목은 이렇다.
 
“주께로 가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한영숙 권사.
1931년 3월 11일 평양에서 태어나
2017년 4월 26일 시드니에서 잠들다.
 
동생네 집 뒷마당 저 멀리 보름달이 떠 있었다. 한 달 전 내가 오클랜드에서 본 그달이 나를 따라,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따라 좇아온 것이다. 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안녕을 알렸다.
“엄마! 조금만 참으세요. 둘째 아들이 사랑하는 엄마 보러 갈 테니까요. 아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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